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황후 여씨 (문단 편집) === 부잣집 아가씨에서 건달 마누라로, 건달 마누라에서 [[황후]]로 === 이름은 여치(呂雉). 한자로는 '[[꿩]] 치(雉)' 자를 쓴다. 때문에 [[한나라]] 당대에는 [[피휘]]하여 꿩을 가리킬 때 雉(치) 대신 野鷄(야계, 들[[닭]]이라는 의미)라는 표현을 썼다. 흔히 《사기》의 본기 제목으로 쓰인 여태후나, 여후(呂后) 같은 '성+지위'로 된 명칭으로 불린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2%B0%ED%98%84|산현]][* 오늘날의 [[산둥성]] [[허쩌시]]에 속해 있는 곳이다.]에서 태어난 부유한 집안의 여식이었으나, 아버지인 여공(呂公, ? ~ 기원전 203)[* 이름이 아니고 그냥 '여씨 어르신', '여씨 나리' 정도의 존칭에 해당한다. 도홍경(陶弘景, 456 ~ 536)의 저서《상경》(相經)의 기록에는 이름이 여문(呂文). 자는 숙평(叔平)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사마정(司馬貞, 679 ~ 732)의《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그 내용을 인용하였다.]이 할 일 없이 패현[* 지금의 쉬저우시 페이 현]에서 배때기나 벅벅 긁고 굴러다니는 [[한고제|유방]]을 보고 그의 몸에 서린 왕기를 간파, 억지로 주겠다 주겠다 애원해서 시집보냈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그녀가 뒤에 숨어서 이야기를 듣다가 [[한고제|유방]]이 계속 거절하니 직접 면담해서 혼인했다고 한다. 그녀는 대담한 기질에 내면에 무서울 정도의 야심을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다. 심지어 포로가 되어서 [[항우]] 앞에 포박당해 있을 때도 '네놈이 뭘 어떻게 할 거냐. 죽일 테면 죽여봐라. 너 따위는 내 남편의 상대가 안 된다.'라는 태도를 유지해서, 항우는 물론 같이 포로가 된 시아버지 [[유태공]]도 모두 벙찌게 만들었을 정도로 담력이 출중했다. 유방과는 달리 가족을 무척 아꼈다. 다만 종친들에 비해서 자식에겐 유방과 마찬가지로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팽성대전]] 와중에 어찌된 일인지 혜제와 노원공주(魯元公主, ?-기원전 187)가 둘이서만 길에 버려져 있었던 것과[* 여후와 태공은 초나라 군사에게 쫓겨다니다가 붙잡힌 게 아니라 미리 도망쳤지만 유방을 찾아다니다가 하필 초나라 군사와 딱 마주쳐서 포로가 된 것이라 자식을 둘이나 잃어버릴 만큼 정신없는 상황은 아니었다.], [[유여의]] 사건 이후 혜제에 대한 행동이 그것이다.[* 조왕 유여의의 일로 1년을 드러누운 혜제 앞에서 보란듯이 똑같은 짐주로 제왕 유비를 독살하려 했고, 5년 후 혜제가 죽었을 때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한고제|유방]]이 건달 시절에 사고를 쳐서 도망다닐 때마다 대신 형벌을 받고 옥살이를 했으며[* 이때 여치가 갇힌 감옥을 관리하던 옥리들이 그녀에게 매일 가혹행위를 하기도 했는데, '임오(任敖, ? ~ 기원전 179년)'라는 옥리의 도움으로 가혹행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임오는 유방의 거병 이후 함양 공략에 나선 유방 대신 본거지인 풍읍을 수비하는 등 전한의 건국에 기여하며 나중에는 어사대부에 광아후(廣阿侯)가 된다. 광아는 현대 중국 싱타이시의 일부다.] 유방이 거병해 곳곳에서 전투를 치를 때에도 그냥 담담히 자기 할 일을 하며 확실히 집안 내조를 했으며, 결국 아버지 여공이 바란대로 귀인의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때부터가 진짜 잔인무도함의 시작[* 또한 야사에서 말하길 여태후는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상냥하고 잔혹함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으나 결혼 후에 고생을 많이 하면서 성격이 변했다고 한다.]이었다. [[토사구팽]]의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한고제|유방]]은 [[한신]], [[팽월]], [[영포|경포]] 등 무위가 있는 개국공신 출신 이성 제후왕들을 모조리 숙청한 후 거기에 유씨 황족들로 갈아치우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지만, 사실 [[한고제|유방]]도 내심 마음이 편치 않았던지 대놓고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면 목숨만은 부지해주려고 했다. [[팽월]]도, [[한신]]도 직위를 빼앗기는 선에서 끝나려는 것을 최종적으로 여후가 나서서 처단했다.[* 다만 팽월, 한신은 중국사에 길이 남고 당대에는 최강 수준으로 군재가 뛰어났다. 거기에 팽월은 유방의 신하라기보단 자체적인 군사력을 지닌 동맹에 가까운 반독립 상태의 상대였다. 고로 살려두면 나중에 반란을 저지를지 모르고, 특히 한신 같은 경우엔 제나라 왕 자리를 두고 유방을 협박한 전적도 있는데다 회음후로 강등된 이후에도 왕 대접을 해준 번쾌를 모욕했다. 왜 이것이 문제냐 하면 번쾌는 여후의 여동생 여수와 결혼한 사람으로 여후 일파의 핵심인물이었다. 거기에 한신은 다다익선의 고사를 보면 알듯이 황제인 유방도 깔아보는 매우 교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인물이 중화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이기까지 하니 여후로썬 숙청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또 다른 모반 이성 제후왕인, 옛 유방의 친구 [[노관]]은 '유방이 병들었고 여후는 왕들을 숙청하니...'라 하면서 여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반을 철회하지 못했고, 유방이 쾌차하면 죄를 빌 생각이었으나 결국 유방이 죽자 흉노에 투항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점점 정치에 개입하는 여후의 행동이 눈 밖에 난 것인지는 불명하나 한고조는 뜬금없이 태자인 [[혜제(전한)|유영]]을 유약하다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가장 총애하는 측실 [[척부인]](戚夫人) 소생인 유여의를 자기와 가장 닮았다고 치켜세우며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척부인도 유여의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면서 여후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러나 '무위지치' 체제가 시대의 흐름인 것에 모두가 동의하는 상황에서 전쟁을 벌일 것도 아닌데 유영의 성격이 문제가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고작 몇 년 전에 후계 구도를 뒤집으며('''[[사구정변]]''') 억지로 황제에 오른 뒤 아예 나라를 말아먹은 [[호해]]의 전례까지 있다보니 곧바로 주창(周昌), [[숙손통]] 등 모든 대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 고집을 부리는 유방으로 인해 여후가 근심하자, 어떤 사람이 '폐하는 [[장량(전한)|유후]]께서 하는 말만큼은 꼭 들어주시니 유후를 한편으로 만들라'고 간한다. 장량을 찾은 여후는 '당대의 은사(隱士)인 상산(商山)의 사호(四皓)[* 각각의 이름은 동원공(東園公, ? ~ ?)·기리계(綺里季, ? ~ ?)·하황공(夏黃公, ? ~ ?)·녹리선생(甪里先生, ? ~ ?)이었다.]를 데려다가 황제의 눈에 띄게 하라' 라는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했는데, 자기가 불러도 오지 않던 명사들이 태자를 따르는 것을 본 [[한고제|유방]]은, 결국 태자를 폐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사실 상산사호가 고조의 부름에는 응하지 않고 태자에게 응한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벽지 건달 출신인 고조 유방은 학자들을 박대하고 면전에서 모욕을 주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비해 태자는 효성과 사덕을 두루 갖춘 인성자로 유명했으니, 태자의 인품을 믿고 청에 응한 것이다.] 대신 유여의를 조왕에 봉하여 그의 모친인 척부인과 함께 가도록 했으며, 자기가 죽은 후 여후가 유여의 모자를 핍박할 것을 우려, 태자 폐위에 반대해 여후에게 도움을 준 주창을 조나라의 재상에 임명했다. 유방이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여후가 고명을 청하며, 재상인 [[소하]]가 연로하였으니 후임 재상을 누구로 할 지 물었다. 유방은 소하의 후임으로 [[조참]]을 지목했다. 여후가 조참 사후에는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까 물으니, [[왕릉(전한)|왕릉]]이 좋겠는데 내정은 [[진평]]이, 군사는 [[주발]]이 보좌하게 하라고 말했다. 여후가 다시금 두 사람의 후임을 물으니, 유방은 짜증이 났는지 다음과 같이 쏘아붙이고 대화를 접어버린다. >'''그 뒤는 당신이 알 바 아니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